냥집사의 소신 발언 “지구상에 고양이가 너무 많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딸 ·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이런 살벌한 문구들이 공익광고 전면을 떡하니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에서 만들고 홍보한 반세기 전 표어들이다. 정부는 1960년대에는 ‘세 자녀’, 1970년대에는 ‘두 자녀’, 1980년대에는 급기야 ‘한 자녀’를 기준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출생률을 낮추는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저출생 현상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는 현재에서 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한때 대한민국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세를 걱정하던 국가였다. 참,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앞에서 언급한 국가 단위의 산아제한 및 출산장려 정책은 이른바 인간 종의 ‘개체수 조절’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로 범위를 넓혀서 살펴보더라도, 개체수가 늘어 일정 한계치를 넘긴 다음부터는 오히려 개체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속에서 개체수가 조절되기도 하며, 특별한 천적이 없는 경우에는 먹이의 양 같은 환경적인 요인이 개체수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지구 생태계의 개체수는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늘고, 줄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조절된다는 것이 현대 생태학이 내놓은 연구 결과다. 개와 고양이를 길들여 반려동물로 삼은 것도 인간이 생태계에 개입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이렇게 생태계가 자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 인간이 개입한다면 어떨까?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기도 하고, 또는 인위적으로 번식을 늘리기도 하면서 생태계에 개입해 왔다. 생존을 위해 야생에서 살던 동물을 길들여서 가축화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가축 중에서도 일부 동물들을 ‘반려동물’ 삼아 가족처럼 여기기도 한다. 개와 고양이가 이 분야의 대표격이다. 특히 고양이의 위상 변화는 극적이다. 이제는 ‘도둑고양이’라는 말조차도 ‘길고양이’로 대체될 정도니까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계가 유지하는 균형에 깊숙이 개입해 왔고, 그런 가운데서도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더욱 적극적으로 균형을 깨뜨리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강아지, 귀여운 고양이는 당신의 집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야생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아,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임감을 갖자는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생태계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자는 것이다. 즉, 개체수 조절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는데…꾸꾸는 발라당 누워 잠을 잡니다. 귀여우면 다야?

TV 마니아 냥님과 사는 집사의 행복한 상상

“마! 니 서마터폰 중독이다!” 흠칫, 놀라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를 사랑해주시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서마터폰, 아니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읽고 계시리라 짐작한다. 굳이 이 글만 콕 집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네이버의 검색 데이터를 살펴보면 모바일 검색량이 PC 검색량을 압도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당장 대중교통 현장을 한 번 생각해보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바닥만한 전자 기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시야에서 떨쳐내기 힘들 것이다. 나 역시 하루 스마트폰 접속 시간이 10시간이 넘는 하드코어 스마트폰 중독자다. 스마트폰 기기가 작고 가벼워진 만큼, 콘텐츠에 몰입하는 일 역시 쉽고 간편해졌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과거에는 ‘서마터폰’ 대신 ‘테레비’, 그러니까 TV가 오랫동안 콘텐츠 중독의 왕좌를 지켜왔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불편해하시는 우리 어머니 역시 광대한 TV 화면으로부터는 자유롭지는 못하다. 사람이 아침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려서 저녁에 눈꺼풀이 다시 무겁게 감길 때까지 우리집 TV는 쉬지도 않고 다채로운 빛을 뿜어낸다. 잠든 어머니의 손에는 항상 리모콘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내가 배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잠으로 빠져들 듯이. 모전자전의 현장! 꾸꾸 역시 엄마를 닮아 TV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양육자로부터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피양육자는 없다. 위대한 모전자전의 원리는 종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 그렇다. 우리집 막내아들 꾸꾸 역시 어머니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닮아 TV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사실 고양이가 TV를 시청하는 것이 세상에서 오직 꾸꾸에게만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은 아니다. 고양이를 위한 유튜브 영상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고양이들이 영상 콘텐츠를 시청하고 있다. 보통 고양이들은 새들이 움직이는 영상에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튜브에서 ‘고양이가 좋아하는 영상’을 찾아보면 백이면 백,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당당하게 주연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새 영상을 틀어 놓으면, 고양이가 사냥을 시도하기도 한다. 새 다음으로 고양이가 좋아하는 스타는 물고기다. ‘어항 들여다보기에 중독된 고양이’가 웹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관찰을 기반으로 우리는 고양이가 작은 물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꾸꾸는 새가 나오는 영상도 좋아하지만, 최애 프로그램은 따로 있었으니…! 꾸꾸도 그렇지 않냐고?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꾸꾸의 티비 시청이 꾸꾸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주장하신다. 나도, 독자분들도 이 시점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시작이네.’ 이번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집사의 ‘주접’으로 끝나리라 예상하고, 벌써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 독자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부디 5분만 더 투자해 주세요! 꾸꾸의 특별한 점은, ‘선호 프로그램’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 고양이들은 작은 물체가 흥미로운 움직임을 보이면 그게 영상이든 실물이든 관계없이 사냥놀이에 나서곤 한다. 하지만 꾸꾸는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모든 프로그램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꾸꾸가 가장 열심히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동물 관련 프로그램’이다. 잠깐, 이러면 새나 물고기에 반응하는 다른 고양이들이랑 다를 바가 없지 않냐고? 아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니까요? 그것은 바로 자연 다큐멘터리와 동물 방송계의 대표주자 <TV 동물농장>이다! <동물의 왕국> 류의 자연다큐멘터리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재미있게도 꾸꾸는 <TV 동물농장>이나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인간 시점으로 만들어진 동물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한다. 단순히 물체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사냥놀이를 시도하는 수준이 아니다.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신다. 단언컨대 꾸꾸는 ‘몰입’한다고.  꾸꾸가 가장 애청하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TV 동물농장>, <고양이를 부탁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맞다. 동물 프로그램 삼대장이다. 꾸꾸와 함께하게 된 이후 드라마 일변도였던 어머니의 플레이리스트에 새롭게 추가된 목록들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는 올림픽 때문에 <TV 동물농장>이 한 차례 결방했을 때 올림픽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시기도 했다.)  TV 볼 때 꾸꾸의 몰입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꾸꾸는 이 프로그램들을 정말 열심히 시청한다. 기본적으로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볼 뿐 아니라, 화면에 사냥놀이가 등장하면 마치 VR 체험이라도 하듯 사냥놀이에 나서기도 하고, 고양이나 강아지 친구들이 나오면 야옹야옹 울기도 한다. 그 모습은 뉴스를 보면서 혼자 욕을 하는 엄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리기라도 하면, 금방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동물도 ‘보던 흐름이 끊기면’ 재미가 없는 것은 사람과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그래서 한 번은 집에 혼자 남겨지는 꾸꾸의 무료함을 덜어주기 위해 “TV를 켜놓고 출근하시는 건 어떠냐.”고 어머니께 건의했다가 전기 요금이 낭비된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당한 적도 있다. (아니 엄마, 꾸꾸 티비 보는 천재 고양이라면서요!) 소심한 반항으로 내가 꾸꾸와 함께 지낼 때는 항상 동물 프로그램이나, 고양이 전용 유튜브 콘텐츠를 항상 틀어놓곤 한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제 몸보다 훨씬 큰 화면 속으로 빠져들기라도 하듯 몰입하는 꾸꾸를 보고 있으면 신기할 따름이다. 저게 몰입이지, 다른

냥님의 선택을 받으려는 ‘캔따개’의 하드코어 미션

인생의 다양한 즐거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이로 씹고 혀로 맛보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쾌감은 그 어떤 감각보다도 즉각적이고 선명하다. 특히 최근에는 범세계적인 역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니 집에서 ‘시켜 먹는 즐거움’이 더욱 각광을 받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지만, 오죽했으면 코로나 유행으로

도와주세요! 추워진 날씨에 집사에게 불어닥친 시련

반려동물들에게 피부병이란 한 번쯤은 꼭 거쳐가곤 하는, 그럼에도 매우 귀찮은 관문 중에 하나다. 수의사들도 개, 고양이들이 동물병원을 찾는 가장 흔한 이유로 피부병을 꼽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링웜(피부사상균증)’으로 불리는 곰팡이성 피부병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발병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람에게도 옮을 수 있는 인수 공통 감염병이기 때문에 주의해서 관리해야 한다.

꾸꾸 ‘생일 선물’에 대한 집사와 냥이의 동상이몽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꾸꾸의~ 생일 축하합니다! 와, 박수!” 2018년 서울 동대문구 어느 오피스텔 앞에서 처음 만난 꾸꾸. 지난 8월 17일은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의 주인공이자,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는 ‘무는 고양이’ 꾸꾸의 생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트리트’ 출신인 꾸꾸에게 생일은 동대문구 모처에서 태어난 ‘서울 깍쟁이’가 50여일 간의 임시 보호를 거쳐 ‘붓싼 싸나이’가 된 날이다. 이날 꾸꾸는 약 다섯 시간에 걸친 장거리 이동 끝에 낯선 공간을 처음 밟았다. 그럼에도 금세 화장실을 가리고 잠을 청하는 등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 ‘천생 집고양이’, ‘누가 보면 여기서 태어난 줄 알겠다’는 평을 들었다. 묘생 4개월 차의 적응력이 이리도 뛰어날 줄이야! 묘생 4개월차 꾸꾸는 엄청난 적응력으로 ‘붓싼 싸나이’가 되었다. 실제로 꾸꾸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인 2018년 4월 초중순(동대문구 모처 수의사 선생님 피셜) 역시 캘린더에 표시해 두고 기억하고 있다. 날짜는 대강 4월 10일쯤으로 정했다. 그리고 꾸꾸가 최초로 구조된 날인 2018년 7월 1일 역시 기념한다. 이름하여 꾸꾸 묘생 3대 명절! 그리하여 사실 꾸꾸의 정확한 생일은 4월 어드메가 되어야 맞겠으나… 가족 내 최고 존엄, 어머니께서 ‘강력하게 꾸꾸가 가족이  된 날이야말로 무조건 최고 기념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우리집에서 가장 크게 기념하는 꾸꾸의 생일은 8월 17일로 정해졌다. 아무튼, 생일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생일 선물 아닌가. 생일 전날, 꾸꾸 누나는 무슨 선물을 줄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장난감이 좋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캣휠을 사줄까? 하지만 안 타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꾸꾸가 중성화 수술 때 함께 피 검사를 받았던 것 말고는 딱히 건강검진이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에 물어봤더니 세 살 정도면 종합검진을 받을 때도 됐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좋다, 우리 꾸꾸의 세 번째 생일 선물은 건강검진이다!  꾸꾸는 아마 생일날에도 이렇게 집에서 늘어져 편히

제발! 오랜만에 본 꾸꾸와 벌인 치열한 두뇌싸움의 결과

강력한 거리두기 조치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기세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지는 모양새다.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 독자분께서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꾸꾸 누나는 재택 근무와 휴가 기간이 겹치면서 짬이 생겨, 잠시 부산 본가에 내려와 꾸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려묘 연재물이라는 주제가 무색하게도 ‘무는 고양이’ 꾸꾸와 떨어져 지내면서 최근에는 ‘랜선 집사’로서 생긴 에피소드를 주로 다뤘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꾸꾸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발굴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꾸꾸와 함께하는 생활 자체가 지친 몸과 마음의 훌륭한 재충전이기에, 최근 꾸꾸 누나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집사 어디 갔다 이제 온거냐옹!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엄마 집사 혼자서 처리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전직 ‘주 양육자’였던 누나 집사가 함께 해치워야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병원 방문’ 이다. 꾸꾸는 다행히 매우 건강하지만 지난 달에 꾸꾸의 심장사상충 약을 사러 집 근처 동물병원에 들렀을 때 수의사 선생님의 권유를 받았다.  다음 달에는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게 어때요? 수의사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셨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꾸꾸의 이름만 듣고도 환하게 웃으시며 ‘아이가 매우 귀여울 것 같다’는 예상을 하셨으니까. 수의사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꾸 없이 또 혼자 동물 병원을 찾았다. 꾸꾸를 이동장에 집어넣는 데 실패해 벌어진 일이었다. 집사라면 공감할 것이다.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데 가장 큰 난관은 바로 ‘고양이를 이동장에 집어넣기’라는 것을. 원래는 꾸꾸와 병원을 찾아, 약도 바르고 겸사겸사 체중도 재고 발톱도 깎아 달라고 부탁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꾸꾸가 이동장에 들어가기를 맹렬하게 거부하면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좀 만 더!

‘모래는 인터넷 주문 안해요’ 한 문장이 가져온 후폭풍

꾸꾸와 가족이 된 후, 꾸꾸를 돌보는 일은 대체로 누나 집사가 담당해 왔다. 물그릇과 밥그릇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냥놀이로 활동량을 책임지고, 화장실을 치우는 등 일일 루틴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해, 양육의 전체적인 계획을 총괄하며 콘트롤했다. 누나 집사가 집을 비운 이후 주양육자는 엄마 집사가 되었다. 필자 제공 그렇다면 엄마 집사는 어떤 일을 담당했을까? ’무는 고양이’ 꾸꾸가 그나마 덜 무는 인간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특수한 임무들을 맡았다. 가령 꾸꾸가 엉덩이에 달고 다니는 똥가루를 닦아 준다거나, 꾸꾸를 목욕시키는 데 앞장선다거나. 그 중에서도 가장 ‘대체가 불가능한’ 일은 매일 퇴근 후 관심을 요구하는 꾸꾸의 가슴과 배를 긁어 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누나 집사가 이 임무를 대신 수행해 보려 했으나, ‘무는 고양이’ 의 완강한 거부 속에 팔다리에 상처만 늘어나곤 했다.  주 양육자였던 누나 집사가 집을 떠나 따로 살게 되면서 엄마 집사와 누나 집사, 두 양육자의 역할 역시 바뀌었다. 엄마 집사가 대부분의 루틴을 떠맡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꾸꾸 누나만의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고양이 용품 주문’이다.  택배를 시키면 안에 들어있는 상품보단 박스에 더 관심 가져야 고양이지! 필자 제공 특히 화장실 모래(꾸꾸는 두부모래를 쓴다)와 사료, 간식 등 먹을 거리가 중요하다. 엄마 집사가 고양이  용품을 잘 모르고, 인터넷 쇼핑도 서툴러 누나 집사가 계속해서 이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꾸꾸 누나가 모래, 사료, 간식 등을 주기적으로 사 보내면, 엄마 집사는 꾸꾸의 사진을 찍어서 주기적으로 꾸꾸 누나에게  전달해 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꾸꾸 집사가 아닌, 꾸꾸의 사진을 구독하는  일종의 ‘구독 경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곤 한다. 아무튼 ‘꾸꾸 사진 구독 서비스’,  줄여서 이른바 ‘꾸독 서비스’는 4개월째 잘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꾸꾸 누나는 얼마 전부터 이 ‘꾸독 서비스’의 작동 방식에 작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SNS에서 ‘고양이 모래는 인터넷으로 주문하지 않는다.’ 는 글을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택배 및 물류업 종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배송 물품 중 하나가 고양이 모래라서, 되도록이면 고양이 모래는 직접 사 온다는 내용의 짧은 글이었다.  이 작은 생명 하나를 거두는 데

힘껏 물려 피 나도 웃음이 난 집사… 도대체 무슨 일이?

개인적으로 이번 6월은 심신이 모두 힘들었던 달이었다. 시작부터 최악이었다.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서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집 밖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출근이 불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회사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다.) 그 기간이 지나자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서 거동이 가능해졌지만, 마음의 상태는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폭식을 하기도 했고, 구토를 하기도 했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고, 하염없이 잠만 자기도 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생존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말 그대로, 죽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있던 나날이었다. 삶이 지치고 힘들 수록 멀리 떨어져있던 꾸꾸 생각이 더 많이 났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힘들면 잠시라도 좋으니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때맞춰 운 좋게도 금, 토, 일요일 3일을 몰아서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 기간 동안 부산의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지난 4월 중순에 상경한 이후 두 달 만이었다. 솔직히 본가로 내려가는 게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했고, 몇 시간이나 걸려서 이동할 기력도 없었다. 그런 내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경기도 모처에서 부산 해운대까지 내려가기로 한 건, 오로지 꾸꾸 때문이었다. 꾸꾸가 정말 사무치게 보고 싶었기 때문에. 고속버스로 다섯 시간을 이동하여 부산에 도착해,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더 움직인 끝에야 본가의 현관문 앞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문 앞에는 내가 며칠 전에 주문한 꾸꾸 화장실 모래 박스가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현관 안쪽으로 박스를 밀어넣자, 익숙한 울음 소리가 들렸다. 유리 중문 너머로 꾸꾸가 야옹야옹 울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꾸꾸는 숨지는 않았지만, 경계를 늦추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자 꾸꾸가 내 발에 머리를 부벼대…는 건 내 희망사항이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일단 튀어나오지만,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침대 밑으로 숨곤 한다. 정말 다행히도 꾸꾸가 날 보고 숨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추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야옹대는 꾸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직행해 냉장고를 열고 “꼬기꼬기~”를 외쳤다. 고기(간식)를 먹자는 의미다. 그러자 꾸꾸가 총알같이 달려와 내 발치에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간식의 힘은 위대했고 적어도 간식에 대한 꾸꾸의 기억은 선명했다. 꾸꾸의 마음을 얻는 데는 북어트릿 두 개면 충분했다. 다시 만난 꾸꾸는 꽤 의젓해져 있었다. 꾸꾸를 구조한 게 2018년 7월이었고, 당시 생후 3개월 정도(서울 동대문 모처 수의사 선생님 추정)였으니 꾸꾸는 2018년 4월생으로 추정된다. 이제 어느덧 만 세 살이 넘은 것이다. 청년 고양이로서 어머니께 효도하고, 사냥놀이도 잘 해서 의젓해졌다는 건 아니다. 반가운 나머지 ‘금기’를 잊고 자꾸 만지려고 드는 누나 집사를 공격하는 대신, 점잖게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는 꾸꾸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오기가 생겨,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졌지만 꾸꾸는 슬쩍슬쩍 피하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릴 뿐이었다. 분명히 이쯤 되면 물었어야 정상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꾸꾸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친구들한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니가 너무 많이 물려서 진짜로 좀 이상해진 것 같다며 원래 고양이는 물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타박을 들었다. 꾸꾸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좀 순해진 거 아니냐고, 축하한다는 인사도 받았다. 그런 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에 본 꾸꾸는 집사의 손길에도 물지 않고 자리를 피하는 낯선 모습을 보였다. 귀가하신 어머니께 이 소식을 알렸더니, 꾸꾸가 확실히 많이 점잖아진 건 사실인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는 꾸꾸가 물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대로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물론 손길을 피하는 것 자체는 여전했지만 그게 어딘가!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꾸꾸에게 간식도 주고, 밥도 주고, 오랜만에 같이 사냥놀이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화장실도 치웠는데, 오랜만에 꾸꾸 맛동산 냄새를 맡으니 향기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꾸꾸와의 만남이 반가웠나 보다. 얼마 전 ‘자꾸 침대에서 자려고 들어서 파양된 고양이’의 입양 홍보 트윗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파양자에게 분개하며 ‘살다살다 이렇게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을 싸지르는 파양 사유는 처음 봤다’며 정말 참신하게 나쁜 놈이라고 길길이 뛰었다. 파양 자체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자꾸 침대에서 자려고 든다’는 사유로 파양을 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누구는 같이 자고 싶어도 못 자는데… 꾸꾸는 나랑 같이 자주지 않는단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는 좀 달랐다. 꾸꾸가 내 침대 옆에 놓아둔 박스에서 잠을 청한 것이다. 아니, 머리맡…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에 준하는 곳에 꾸꾸가 있다니! 놀랍게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까지도 꾸꾸는 박스 안에 있었다. 항상 자리를 옮겨가며 끊어 자는 버릇이 있는 꾸꾸에게선 보기 드문

작은 털뭉치와 살면서 생긴 집사의 간절한 소망

누군가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라이프스타일이 바뀐다는 걸 의미한다. 생활 습관도 서로 조율해야 하고, 필요와 욕망의 형태도 변화한다. 당장 동거하는 구성원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고, 둘이 아니라 셋이 될 때 장바구니에 담기는 물건 구성부터 많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성인이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이 새 구성원으로 합류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함께하는 상대에 따라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변화는 불가피하다.  스스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인간과의 동거조차 그러한데, 생활하는 데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오죽할까! 산책을 나가고 실외배변을 하는 강아지를 키우게 된 멍집사는 반려견에 맞춰 자신의 생활 습관을 규칙적으로 설정하곤 한다. 게다가 개는 사람에 정서적 의존도가 큰 동물인만큼, 외출할 때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한다. 굳이 반려동물까지 가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식물을 길러도 출타 시에는 이런저런 대비가 필요하다. 종을 막론하고, 나 아닌 다른 삶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중대한 결심을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귀여운 털뭉치와 함께 살면서 내 삶에 바뀐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고양이는 개보다 비교적 독립적인 동물이니 사정이 좀 나을까? 개체 별로 지닌 특색과 성격이 다른 만큼 확실하게 말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개들에게 산책을 떼어 놓을 수 없다면 고양이에게는 사냥놀이와 캣타워가 필수적이다. 넓은 집에 산다면 사냥놀이를 해 주는 것이나 캣타워를 하나 놓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원룸에 거주한다면 공간적으로 꽤 부담이 된다. 캣타워 뿐만이 아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는 모래에 배변하므로 화장실에 모래를 깔아줘야 하는데, 그러면 고양이가 배변을 할 때 모래를 파헤치면서 집안이 모래 범벅이 된다.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바닥에 깔린 모래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언제 모래알이 내 발바닥을 찌르더라도 화내지 않고 익숙하게 모래알을 떼어낼 수 있을 때, 드디어 집사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사야! 지금도 집순이면서 얼마나 더 집에 있고 싶은거냥! 개인적으로 꾸꾸 누나가 꾸꾸와 함께 하면서 겪게 된 가장 큰 변화는 ‘정주하는 삶’에 욕망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꾸꾸 누나는 ‘집순이’다. 어렸을 때

게임 속 냥이 덕질하던 랜선 집사, ‘진짜 집사’로 거듭난.Ssul

반려동물을 안 키워 본 사람과 스마트폰에 게임이 단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사람. 요즘 시대에 둘을 비교하면 누가 더 적을까? 아마도 후자이지 않을까. 이제는 ’요즘’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로 연령 불문, 다양한 계층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전세계적 역병으로 인해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면서 게임용 모니터, 콘솔 게임 등 게임 관련 주변기기 시장 역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현실을 살아내며 느끼는 팍팍함을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위로 받는 모양새다. 꾸꾸 누나는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그 드물다는 ‘스마트폰에 게임이 단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그 사람이 바로 꾸꾸 누나다. 주변인들이 나누는 화제에 끼고 싶어서 게임과 친해지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봤지만, 늘상 잘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게임 캐릭터를 조작해 열심히 사냥을 하고, 사냥감을 모아 돈으로 바꾸고, 바꾼 돈으로 게임 내에서 가질 수 있는 부동산을 구입하는 순간 진한 허무감에 빠져든다. 현실에서도 집세를 내려고 죽어라 일하는데, 놀자고 하는 게임에서도 ‘내 집 한 칸’ 구하자고 이렇게 삽질을 하고 있다니! 각종 스마트폰 게임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하다가도 흐름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거나, 랭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놀자고 하는 게임인데 왜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라는 생각에 울컥하여 게임을 삭제해 버리곤 했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꾸꾸 누나가 유일하게 오랫동안 했던 게임인 ‘심즈’ 그렇게 게임과 안 친한 꾸꾸 누나지만, 어쩐지 컴퓨터에서 지웠다가도 주기적으로 다시 설치하게 되는 게임이 있다. 바로 ‘심즈’ 시리즈다. 심즈는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심’이라고 불리는 아바타를 이용해 유사하게 구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사이버 인형놀이’ 라고 보면 된다. 아니, 고양이 얘기 하는 연재물에서 언제까지 게임 얘기만 할 거냐고?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게임 얘기를 한 이유가 다 있다. 이 심즈 속 세계에서는 반려동물, 그 중에서도 고양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꾸꾸 누나는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곤 했다. 게임은 ‘랜선집사’가 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심즈로 구현한 랜선 꾸꾸’ , 정말 똑같지 않은가? 아직 꾸꾸와 만나기 전, 반려동물의 온기가 고플 때마다 꾸꾸 누나는 ‘심즈’를 플레이했다. 심즈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품종의 고양이와 강아지들을 고를 수 있으며, 반려동물의 성격 또한 입맛에 맞게 설정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게임 속 고양이 아바타를 만들 때마다 언제나 ‘영리함’, ‘다정함’, ‘상냥함’ 특성을 가진 러시안 블루를 선택하곤 했다. 인간을 좋아하게끔 설정한 성격 덕분에 고양이는 언제나 나를 살갑게 따랐고, 나는 고양이를 폭 안고 마음껏 스킨십하며 현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온기를 마음껏 느끼곤 했다. 뒤치다꺼리도 즐거웠다. 나는 클릭만 하면 되고, 실제로 배변 상자를 치우는 것은 내 아바타였으니까. 물론 만지는 것도 내 아바타긴 했지만….

오갈 데 없어진 꾸꾸? 냥집사가 눈물 머금고 포기한 것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고양이의 인연은 각별하다.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와 함께 자랐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가 작가가 되기 전 운영했던 재즈바 ‘피터 캣(Peter Cat)’의 이름은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다.여러모로 고양이 사랑이 유별난 하루키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이 있다. 가난했던 대학 시절,

“초보 집사 시절 앓던 병을 이제는 엄마가 앓고 있어요”

꾸꾸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동물공감에 격주로 업데이트되는 이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장비는 워드프로세서 용도로 사용하는 맥북 프로 2015년형이다. 나는 인터넷에 연결된 맥북을 사용해 자료를 찾고, 글을 타이핑하고, 편집자님께 송고한다. 여기에 손목과 허리, 목의 건강을 위해 맥북에

고양이, ‘영물’과 ‘요물’사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만큼 속설과 미신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다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일반적인 동물을 넘어 ‘영물’과 ‘요물’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 ‘고양이는 귀신을 보고 쫓는다’는 속설부터 시작해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하다’(물론 글쓴이는

우리집 평화 유지냥 ‘꾸꾸’가 냉전을 끝내는 방법

경상도 사람이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견이다. 서울내기 내 친구는 ‘서울깍쟁이’처럼 굴지만 그 누구보다 목소리가 크고 ‘부산’스럽다. 옆에서 지켜보면 그야말로 일상 자체가 뮤지컬이 따로 없다. 부산 출생의 경상도 토박이인 나는 아주 침착한 성격이다. 목소리 톤도 낮고 차분해서, 평소에도 마치 기자나 아나운서가 말하는 것 같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기에

새해 첫날 만난 ‘우연’이 만든 집사의 은밀한 취향

꾸꾸와 함께하기 전,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인을 대하는 말투와 반려동물을 대하는 말투는 동일하다고. 듣고 보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어느 쪽이 됐든 사랑하는 상대에게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정을 가득 담아 부르는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연애를 하기 전까지 내가 낯간지러운 하이 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