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집사의 소신 발언 “지구상에 고양이가 너무 많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딸 ·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이런 살벌한 문구들이 공익광고 전면을 떡하니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에서 만들고 홍보한 반세기 전 표어들이다. 정부는 1960년대에는 ‘세 자녀’, 1970년대에는 ‘두 자녀’, 1980년대에는 급기야 ‘한 자녀’를 기준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출생률을 낮추는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저출생 현상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는 현재에서 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한때 대한민국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세를 걱정하던 국가였다. 참,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앞에서 언급한 국가 단위의 산아제한 및 출산장려 정책은 이른바 인간 종의 ‘개체수 조절’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계로 범위를 넓혀서 살펴보더라도, 개체수가 늘어 일정 한계치를 넘긴 다음부터는 오히려 개체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된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속에서 개체수가 조절되기도 하며, 특별한 천적이 없는 경우에는 먹이의 양 같은 환경적인 요인이 개체수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지구 생태계의 개체수는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늘고, 줄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조절된다는 것이 현대 생태학이 내놓은 연구 결과다. 개와 고양이를 길들여 반려동물로 삼은 것도 인간이 생태계에 개입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이렇게 생태계가 자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 인간이 개입한다면 어떨까?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키기도 하고, 또는 인위적으로 번식을 늘리기도 하면서 생태계에 개입해 왔다. 생존을 위해 야생에서 살던 동물을 길들여서 가축화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가축 중에서도 일부 동물들을 ‘반려동물’ 삼아 가족처럼 여기기도 한다. 개와 고양이가 이 분야의 대표격이다. 특히 고양이의 위상 변화는 극적이다. 이제는 ‘도둑고양이’라는 말조차도 ‘길고양이’로 대체될 정도니까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계가 유지하는 균형에 깊숙이 개입해 왔고, 그런 가운데서도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더욱 적극적으로 균형을 깨뜨리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강아지, 귀여운 고양이는 당신의 집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야생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아,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임감을 갖자는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생태계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자는 것이다. 즉, 개체수 조절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는데…꾸꾸는 발라당 누워 잠을 잡니다. 귀여우면 다야?

어느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의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1952년 시인 김춘수가 발표한 시 ‘꽃’의 초반부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널리 사랑받은 구절이다. 시 전문을 통틀어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것을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행위에 대한 묘사가 마치 사랑을 암시하는 듯해 대표적인 ‘사랑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길에서 위태롭게 버티던 고양이에게 ‘꾸꾸’라는 이름을 지어준 후, 나의 삶은 크게 변했다. 고양이 글 읽으러 들어왔는데, 갑작스럽게 펼쳐진 예상 밖의 ‘문학 시간’에 당황하신 독자분들도 계실 테니 시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그러니까 내가 굳이 시를 인용해 가면서까지 전달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대상을 특별하게 인식하게 되는,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이다. 특별한 인식은 곧 애착과, 애착은 넓게 봤을 때 사랑과 연결된다. 길에 사는 고양이들을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길고양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인식 체계 속 고양이의 위상이 같을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익명의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도 그러한데, 앞으로 평생 사랑해야 할 반려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건 정말로 의미가 각별할 터다.  구조 당시 꾸꾸의 모습, 구조 후에 붙여준 이름은 ‘꾸꾸’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꾸꾸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 전에 이해를 돕고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꾸꾸는 생후 3개월(추정) 때 서울 동대문구 모처에서 구조된 ‘스트리트’ 출신 고양이다. 2018년에 입양돼 만으로는 3년, 햇수로는 4년째 우리집에서 살고 있으니 이제 길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테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처음 발견됐을 당시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이, 혼자 덜렁 오피스텔 입구 쓰레기통 위에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내가 최종 입양자가 됐지만, 나라고 처음부터 꾸꾸에게 기꺼운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톡방에 올라온 고양이처럼 생긴 먼지덩어리 사진을 보고서 “부모가 데려갈 테니 제발 줍지 말라.”고 제일 열심히 만류했던 사람도 나였고, 구조자 친구가 이름을 붙여주려고 할 때 “키우지도 않을 건데 이름은 무슨 이름이냐. 비 그치면 그냥 풀어줘라.”고 매정하게 말했던 사람도 나였다. 아니, 세상에 길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다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나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새까만 먼지덩어리 사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되는 거 알지만…산책의 유혹에 빠진 냥집사의 딜레마

그야말로 ‘역대급’ 이던 무더위가 무색하게도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닿는 공기가 부쩍 싸늘해졌다. 때아닌 가을 장마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가끔 드러나는 푸른 하늘은 더없이 깊고 청명하다. 가을이 된 것이다. 꾸꾸 누나는 사계절을 통틀어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까지, 그 기간동안 일어나는 일들과 드러나는 색채들을 사랑한다. 많은 시인들이 가을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노래한다지만, 꾸꾸 누나에게는 이제서야 ‘새로운 해’에 제대로 적응했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이다.  사랑하면 나누고 싶다고 했던가.  ‘무는 고양이’ 꾸꾸는 계절의 변화를, 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항상 실내에 머무르는 꾸꾸가 사람만큼 계절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까? 왠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고양이에게 계절마다 나타나는 대표적인 변화가 털갈이인데, 실내 고양이들은 사시사철 비슷한 온도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내 털갈이 중인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 보일러를 틀면 따뜻한 곳을 귀신처럼 찾아가는 꾸꾸. 방바닥 온도가 꾸꾸에겐 계절 변화의 지표일까. 물론, 꾸꾸도 ‘더위가 물러갔다는 것’ 자체는 느낄 것이다. 여름나기용으로 장만해뒀던 대리석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방치해뒀던 숨숨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늘었다. 보일러를 트는 시기가 되면 가장 따뜻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 배를 깔고 누워 아무렇지도 않게 집사들을 올려다볼 터다.  ‘이 멋진 턱시도에 빨간 넥타이를 달고 산책을 나가면…’ 잠시 집사의 헛된 상상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뭔가 아쉬웠다. ‘온·습도 등의 변화 말고도 분명 계절의 변화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존재하건만 꾸꾸는 이걸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의 아름다움, 특히 가을의 그것을 만끽하는데는 산책이 제격이다. 고양이도 강아지처럼 산책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꾸꾸가 입고 있는 근사한 턱시도에 깜찍한 빨간 넥타이를 달고, 하네스를 채워서 같이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튜브를 보니까 산책냥이들도 많던데…(정신차렷!) 하지만 하네스를 착용한 꾸꾸와 공원을 산책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실내 고양이에게 산책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고양이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네스로부터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외부의 각종 벌레 및 질병에 취약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영역동물이기 때문에 낯선 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길고양이들과 영역 다툼을 벌일 위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로, 전문가들은 고양이와의 산책을 만류한다. 꾸꾸와의 두뇌 싸움 결과, 장만한 이동장이지만… 조만간

제발! 오랜만에 본 꾸꾸와 벌인 치열한 두뇌싸움의 결과

강력한 거리두기 조치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기세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지는 모양새다.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 독자분께서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꾸꾸 누나는 재택 근무와 휴가 기간이 겹치면서 짬이 생겨, 잠시 부산 본가에 내려와 꾸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려묘 연재물이라는 주제가 무색하게도 ‘무는 고양이’ 꾸꾸와 떨어져 지내면서 최근에는 ‘랜선 집사’로서 생긴 에피소드를 주로 다뤘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꾸꾸와 함께하면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발굴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꾸꾸와 함께하는 생활 자체가 지친 몸과 마음의 훌륭한 재충전이기에, 최근 꾸꾸 누나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집사 어디 갔다 이제 온거냐옹!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엄마 집사 혼자서 처리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전직 ‘주 양육자’였던 누나 집사가 함께 해치워야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병원 방문’ 이다. 꾸꾸는 다행히 매우 건강하지만 지난 달에 꾸꾸의 심장사상충 약을 사러 집 근처 동물병원에 들렀을 때 수의사 선생님의 권유를 받았다.  다음 달에는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게 어때요? 수의사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셨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꾸꾸의 이름만 듣고도 환하게 웃으시며 ‘아이가 매우 귀여울 것 같다’는 예상을 하셨으니까. 수의사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꾸 없이 또 혼자 동물 병원을 찾았다. 꾸꾸를 이동장에 집어넣는 데 실패해 벌어진 일이었다. 집사라면 공감할 것이다.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데 가장 큰 난관은 바로 ‘고양이를 이동장에 집어넣기’라는 것을. 원래는 꾸꾸와 병원을 찾아, 약도 바르고 겸사겸사 체중도 재고 발톱도 깎아 달라고 부탁드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꾸꾸가 이동장에 들어가기를 맹렬하게 거부하면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좀 만 더!

‘모래는 인터넷 주문 안해요’ 한 문장이 가져온 후폭풍

꾸꾸와 가족이 된 후, 꾸꾸를 돌보는 일은 대체로 누나 집사가 담당해 왔다. 물그릇과 밥그릇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냥놀이로 활동량을 책임지고, 화장실을 치우는 등 일일 루틴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해, 양육의 전체적인 계획을 총괄하며 콘트롤했다. 누나 집사가 집을 비운 이후 주양육자는 엄마 집사가 되었다. 필자 제공 그렇다면 엄마 집사는 어떤 일을 담당했을까? ’무는 고양이’ 꾸꾸가 그나마 덜 무는 인간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특수한 임무들을 맡았다. 가령 꾸꾸가 엉덩이에 달고 다니는 똥가루를 닦아 준다거나, 꾸꾸를 목욕시키는 데 앞장선다거나. 그 중에서도 가장 ‘대체가 불가능한’ 일은 매일 퇴근 후 관심을 요구하는 꾸꾸의 가슴과 배를 긁어 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누나 집사가 이 임무를 대신 수행해 보려 했으나, ‘무는 고양이’ 의 완강한 거부 속에 팔다리에 상처만 늘어나곤 했다.  주 양육자였던 누나 집사가 집을 떠나 따로 살게 되면서 엄마 집사와 누나 집사, 두 양육자의 역할 역시 바뀌었다. 엄마 집사가 대부분의 루틴을 떠맡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꾸꾸 누나만의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고양이 용품 주문’이다.  택배를 시키면 안에 들어있는 상품보단 박스에 더 관심 가져야 고양이지! 필자 제공 특히 화장실 모래(꾸꾸는 두부모래를 쓴다)와 사료, 간식 등 먹을 거리가 중요하다. 엄마 집사가 고양이  용품을 잘 모르고, 인터넷 쇼핑도 서툴러 누나 집사가 계속해서 이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꾸꾸 누나가 모래, 사료, 간식 등을 주기적으로 사 보내면, 엄마 집사는 꾸꾸의 사진을 찍어서 주기적으로 꾸꾸 누나에게  전달해 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꾸꾸 집사가 아닌, 꾸꾸의 사진을 구독하는  일종의 ‘구독 경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곤 한다. 아무튼 ‘꾸꾸 사진 구독 서비스’,  줄여서 이른바 ‘꾸독 서비스’는 4개월째 잘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꾸꾸 누나는 얼마 전부터 이 ‘꾸독 서비스’의 작동 방식에 작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SNS에서 ‘고양이 모래는 인터넷으로 주문하지 않는다.’ 는 글을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택배 및 물류업 종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배송 물품 중 하나가 고양이 모래라서, 되도록이면 고양이 모래는 직접 사 온다는 내용의 짧은 글이었다.  이 작은 생명 하나를 거두는 데

작은 털뭉치와 살면서 생긴 집사의 간절한 소망

누군가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라이프스타일이 바뀐다는 걸 의미한다. 생활 습관도 서로 조율해야 하고, 필요와 욕망의 형태도 변화한다. 당장 동거하는 구성원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고, 둘이 아니라 셋이 될 때 장바구니에 담기는 물건 구성부터 많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성인이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이 새 구성원으로 합류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함께하는 상대에 따라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변화는 불가피하다.  스스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인간과의 동거조차 그러한데, 생활하는 데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오죽할까! 산책을 나가고 실외배변을 하는 강아지를 키우게 된 멍집사는 반려견에 맞춰 자신의 생활 습관을 규칙적으로 설정하곤 한다. 게다가 개는 사람에 정서적 의존도가 큰 동물인만큼, 외출할 때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한다. 굳이 반려동물까지 가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식물을 길러도 출타 시에는 이런저런 대비가 필요하다. 종을 막론하고, 나 아닌 다른 삶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중대한 결심을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귀여운 털뭉치와 함께 살면서 내 삶에 바뀐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 고양이는 개보다 비교적 독립적인 동물이니 사정이 좀 나을까? 개체 별로 지닌 특색과 성격이 다른 만큼 확실하게 말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개들에게 산책을 떼어 놓을 수 없다면 고양이에게는 사냥놀이와 캣타워가 필수적이다. 넓은 집에 산다면 사냥놀이를 해 주는 것이나 캣타워를 하나 놓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원룸에 거주한다면 공간적으로 꽤 부담이 된다. 캣타워 뿐만이 아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는 모래에 배변하므로 화장실에 모래를 깔아줘야 하는데, 그러면 고양이가 배변을 할 때 모래를 파헤치면서 집안이 모래 범벅이 된다. 고양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바닥에 깔린 모래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언제 모래알이 내 발바닥을 찌르더라도 화내지 않고 익숙하게 모래알을 떼어낼 수 있을 때, 드디어 집사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사야! 지금도 집순이면서 얼마나 더 집에 있고 싶은거냥! 개인적으로 꾸꾸 누나가 꾸꾸와 함께 하면서 겪게 된 가장 큰 변화는 ‘정주하는 삶’에 욕망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꾸꾸 누나는 ‘집순이’다. 어렸을 때

게임 속 냥이 덕질하던 랜선 집사, ‘진짜 집사’로 거듭난.Ssul

반려동물을 안 키워 본 사람과 스마트폰에 게임이 단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사람. 요즘 시대에 둘을 비교하면 누가 더 적을까? 아마도 후자이지 않을까. 이제는 ’요즘’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로 연령 불문, 다양한 계층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다. 전세계적 역병으로 인해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면서 게임용 모니터, 콘솔 게임 등 게임 관련 주변기기 시장 역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현실을 살아내며 느끼는 팍팍함을 게임 속 ‘가상현실’에서 위로 받는 모양새다. 꾸꾸 누나는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그 드물다는 ‘스마트폰에 게임이 단 하나도 깔려 있지 않은’ 그 사람이 바로 꾸꾸 누나다. 주변인들이 나누는 화제에 끼고 싶어서 게임과 친해지려고 여러 차례 시도해봤지만, 늘상 잘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게임 캐릭터를 조작해 열심히 사냥을 하고, 사냥감을 모아 돈으로 바꾸고, 바꾼 돈으로 게임 내에서 가질 수 있는 부동산을 구입하는 순간 진한 허무감에 빠져든다. 현실에서도 집세를 내려고 죽어라 일하는데, 놀자고 하는 게임에서도 ‘내 집 한 칸’ 구하자고 이렇게 삽질을 하고 있다니! 각종 스마트폰 게임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하다가도 흐름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거나, 랭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놀자고 하는 게임인데 왜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라는 생각에 울컥하여 게임을 삭제해 버리곤 했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꾸꾸 누나가 유일하게 오랫동안 했던 게임인 ‘심즈’ 그렇게 게임과 안 친한 꾸꾸 누나지만, 어쩐지 컴퓨터에서 지웠다가도 주기적으로 다시 설치하게 되는 게임이 있다. 바로 ‘심즈’ 시리즈다. 심즈는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심’이라고 불리는 아바타를 이용해 유사하게 구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사이버 인형놀이’ 라고 보면 된다. 아니, 고양이 얘기 하는 연재물에서 언제까지 게임 얘기만 할 거냐고?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게임 얘기를 한 이유가 다 있다. 이 심즈 속 세계에서는 반려동물, 그 중에서도 고양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꾸꾸 누나는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곤 했다. 게임은 ‘랜선집사’가 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심즈로 구현한 랜선 꾸꾸’ , 정말 똑같지 않은가? 아직 꾸꾸와 만나기 전, 반려동물의 온기가 고플 때마다 꾸꾸 누나는 ‘심즈’를 플레이했다. 심즈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품종의 고양이와 강아지들을 고를 수 있으며, 반려동물의 성격 또한 입맛에 맞게 설정할 수 있다. 당시에 나는 게임 속 고양이 아바타를 만들 때마다 언제나 ‘영리함’, ‘다정함’, ‘상냥함’ 특성을 가진 러시안 블루를 선택하곤 했다. 인간을 좋아하게끔 설정한 성격 덕분에 고양이는 언제나 나를 살갑게 따랐고, 나는 고양이를 폭 안고 마음껏 스킨십하며 현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온기를 마음껏 느끼곤 했다. 뒤치다꺼리도 즐거웠다. 나는 클릭만 하면 되고, 실제로 배변 상자를 치우는 것은 내 아바타였으니까. 물론 만지는 것도 내 아바타긴 했지만….

누나 집사 부재 중 발생한 ‘유혈사태’의 결말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현재 ‘집사’ 꾸꾸 누나는 ‘무는 고양이’ 꾸꾸와 따로 살고 있다. 지난 연재분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부산에 살고 있던 꾸꾸 누나는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서울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모험을 떠났다. 반드시 거액의 상금이 걸린 문학상을 타서 금의환향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로 말이다. 하지만 꾸꾸 누나의 ‘전업 작가’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꾸꾸 누나가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엄마 집사’ 어머니께서 ‘혼자 꾸꾸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제 그만 꾸꾸를 데려가라.’고 선전포고를 하신 것이다. 대작을 쓰겠답시고 매일 노트북과 눈싸움만 하던 꾸꾸 누나는 급하게 직장을 다시 구해야만 했다. 여기에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꾸꾸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있던 찰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실은 그냥 외로워서 해본 소리였다’는 엄마 집사의 고백이 이어지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이제 그만 꾸꾸를 데려가라’는 선전포고와 ‘그냥 외로워서 해 본 소리였다’는 고백 사이에 벌어진 몇 가지 일을 써볼까 한다. 내가 집을 비운 동안 엄마 집사와 꾸꾸 사이에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꾸꾸에게 급여하는 사료의 양을 줄였다. 꾸꾸 누나가 친구 집의 터줏대감인 ‘안 무는’ 고양이 두 마리와 지내면서 ‘고양이는 늘 약간 배고픈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 무는 고양이 두 마리와 하찮은 집사의 이야기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라!)  고양이들 중 한 마리가 비만묘인데, 지병으로 고지혈증을 앓고 있어 식사량을 엄격하게 제한한다고 했다. 아니, 고양이도 고지혈증에 걸려? 깜짝 놀란 꾸꾸 누나는 황급히 엄마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급여량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한때 꾸꾸의 다이어트를 시도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두 집사 다 집을 오래 비우는 날이 이어지자 먹는 즐거움이라도 누리라며 다시 자율 급식을 하던 차였다. 제한급식이라니! 먹고 자는 것이 낙인 꾸꾸에게 닥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집사의 과장이 아니다. 항상 배부르게 먹고 남긴 다음 새 사료를 리필 받는 데 익숙해져 있던 꾸꾸에게는 이전보다 엄격해진 제한 급식이 처음에는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줄어든 양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료를 다 먹어 버리곤 했다. 그릇에 오래 남아 있는 사료는 잘 먹지 않는 습관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개의치 않을 만큼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러고는 엄마 집사의 퇴근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도어락 번호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나와 어머니의 발치에 몸을 비벼댔다. 꾸꾸가 얼마나 심하게 몸을 비벼댔는지, 엄마 집사는 꾸꾸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기상하실 무렵이 되면(대략 새벽 5시쯤 되는 시간이다) 귀신같이 다가와 살짝살짝 팔을 물며 치대기도 했다. 첫 간식을 달라는 것이다.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꾸꾸도 새로운 급여량에 적응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보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로 게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던 처음과 달리, 이제는 줄어든 양에 맞게 다시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건지 다시 오래된 사료를 남기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사료를 진짜 리필해 주거나, 혹은 리필한 것처럼 사료를 뒤적거려줘야 다시 먹는다. 까다로운 녀석.) 퇴근하신 어머니에 대한 반응도 영 시큰둥해졌다. 원형 스크래쳐 안에 몸을 말고 누워 눈만 껌벅거리는 녀석에게 어머니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드셨다고 한다. 그래도 꾸꾸 누나에게 전화를 건 엄마 집사의 목소리는 밝았다. “우리 꾸꾸가 식탐이 많은 아는 아니지.” 뭐든지 자랑으로 승화시키는 엄마 집사였다.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꾸꾸와 엄마 집사 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 집사가 청소를 하던 도중, 갑자기 꾸꾸가 청소기에 날카롭게 반응하며 하악질을 해댄 것이 시작이었다. 원래 꾸꾸가 청소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아니었던 터라 엄마 집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청소를 이어갔는데, 그날따라 꾸꾸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엄마 집사의 제지에도 계속해서 청소기를 공격했다. 그렇다고 청소를 안 할 수도 없고, 싫다는 고양이에게 청소기를 계속 들이댈 수도 없었다. 엄마 집사는 꾸꾸를 잠시 다른 방으로 격리해 두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거기서 일이 터졌다. 꾸꾸가 엄마 집사의 손을 공격한 것이다. 공격당한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는 가운데 엄마 집사는 당황과 분노에 휩싸였다. ‘내가 맹수를 키우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순간적으로 ‘이 고양이랑 계속 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꾸꾸가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워진 엄마 집사는 일단 계속해서 으르렁대는 꾸꾸를 진정시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북어트릿 한 조각을 주었다. 간식 먹은 꾸꾸는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그 틈을 타 엄마 집사는 꾸꾸를 베란다로 몰아 격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꾸꾸 누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아 한참 동안 꾸꾸와 엄마 집사는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 전화가 연결됐다. 그제서야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어머니의 손을 걱정하면서도, 간식을 준 것은 잘못된 대처였다고 말씀드렸다. 일단 오늘은 더 이상의 간식 없이, 꾸꾸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격리시켜 두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많이 놀란 상태셨던 어머니는 전화 통화를 하며 꾸꾸가 얼마나 사납게 굴었는지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자식같이 키우던 녀석에게 공격받은 것 자체가 큰 충격이셨던 듯했다. 공교롭게도 어머니께서 ‘이제 그만 꾸꾸를 데려가라’고 말씀하신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이제 꾸꾸와 어머니의 인연은 여기까진가 보다’라며 체념했다. 그러나 다시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어머니는 다행히도 이전처럼 ‘엄마 집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계셨다. 격리 후, 꾸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하셨다. 정황상 꾸꾸의 공격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청소기였던 것 같았고, 무엇보다 꾸꾸가 격리당한 이후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고 하셨다. 공격당한 당일은 사료 급여를 중지했지만, 다음날 새벽 5시에 눈을 떴을 때 영 서먹하게 구는 꾸꾸에게 북어트릿을 먹이며 단단히 타일렀다고도 하셨다. 꾸꾸 누나는 무슨 영문인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당사자들끼리 잘 해결했다니 그저 다행일 따름이었다.  이렇듯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며 엄마 집사와 꾸꾸의 관계는 더 단단해졌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꾸꾸 누나가 “꾸꾸를 데려가겠다”라고 하자 “꾸꾸를 데려가라는 건 그냥 해 본 소리였다. 내게서 꾸꾸를 뺏어갈 수는 없다. 꾸꾸와 나는 1+1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온 걸 보면, 확실하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막둥이 꾸꾸가 채워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나는 어머니께 꾸꾸를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지만, 어쩌면 꾸꾸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를 부탁해, 그리고 고양이에게 부탁해! 꾸꾸 누나고양이 꾸꾸와 함께 물고 물리는 일상을 보내며 글 쓰는 작가. 한겨레21이 2020년 주최한 제12회 ‘손바닥문학상’에서 ‘양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로 가작에 당선됐다. 꾸꾸에게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물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오갈 데 없어진 꾸꾸? 냥집사가 눈물 머금고 포기한 것

세계적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고양이의 인연은 각별하다.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와 함께 자랐고,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가 작가가 되기 전 운영했던 재즈바 ‘피터 캣(Peter Cat)’의 이름은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다.여러모로 고양이 사랑이 유별난 하루키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이 있다. 가난했던 대학 시절,

‘바보야, 문제는…!’ 재택근무하던 냥집사의 깨달음

매일 뉴스를 보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 백신 관련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어느덧 코로나19가 일상 속에 침투한지도 일 년이 넘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은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변화는 ‘뉴노멀’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우리 주변의 ‘뉴노멀’한 풍경들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재택근무의 활성화다. 코로나19 집단 감염을 피하기

고양이, ‘영물’과 ‘요물’사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만큼 속설과 미신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다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일반적인 동물을 넘어 ‘영물’과 ‘요물’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 ‘고양이는 귀신을 보고 쫓는다’는 속설부터 시작해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하다’(물론 글쓴이는

새해 첫날 만난 ‘우연’이 만든 집사의 은밀한 취향

꾸꾸와 함께하기 전,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인을 대하는 말투와 반려동물을 대하는 말투는 동일하다고. 듣고 보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어느 쪽이 됐든 사랑하는 상대에게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정을 가득 담아 부르는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연애를 하기 전까지 내가 낯간지러운 하이 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꾸꾸에게 ‘동공 지진’ 준 이사, 그 후 집사가 깨달은 것

최근 이사를 했다. 꾸꾸와 함께 부산에 살고 있는 것 아니었냐고? 정확히 말하면 오랫동안 타지역에 방치되어 있던 살림살이를 지금 살고 있는 부산 집으로 옮겨 왔다. 사실 자취를 하던 시절,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전세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아무튼 <무는 고양이와 하찮은 집사>는 부동산 연재물이 아니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